웃픈 얼굴.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언뜻 말이 안되는 조합의 단어들입니다. 반의어의 기괴한 조합. 하지만 묘하게 전달되는 느낌. 오늘 소개하는 오르시아 바우하우스가 그렇습니다. 오르시아 웨딩밴드 바우하우스가 전하는 모던함과 클래식함, 또는 컴플렉스함의 믹스매치. 오르시아의 돋보이는 기술력으로 탄생한 바우하우스만의 뛰어난 착용감을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웨딩밴드 바우하우스(Bauhaus by 오르시아)
웨딩밴드 바우하우스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럽 전역에 모더니즘의 씨앗을 뿌린 교육기관 바우하우스(Bauhaus. 1919년 독일 바이마르 개교)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한 제품입니다.
실제로 바우하우스를 디자인한 오르시아 수석 디자이너는 바우하우스 출신의 바실리 칸딘스키의 작품에 크게 매료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바실리 칸딘스키는 러시아 태생의 추상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이 전까지만 해도 명확하고 딱 맞아 떨어지는 느낌을 좋아했던 터라 추상화가 주는 불분명함에 대해서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날, 칸딘스키의 작품에서 스치듯 느껴지던 감정. 그때의 그 오묘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불명확함 속에서 느껴지던 알 수 없는 명확함. 그 느낌을 잊지 않기 위해 발 빠르게 에스키스 노트에 스케치를 시작했죠. 그렇게 오르시아 바우하우스는 탄생되었습니다.
모더니즘을 강조한 바우하우스에 추상화가로 알려진 칸딘스키라니. 오르시아 웨딩밴드에도 모던함과 컴플렉스함을 믹스매치했습니다. 단순한 원의 형태처럼 보이지만 사실 3가지의 합금을 이어 하나의 밴드가 되었습니다.
2. ‘바우하우스가 바우하우스가 된’ 이야기
사실 믹스매치한 디자인에 붙는 이름들은 다양합니다. 더 세련되고 엘레강스함을 덧대어 어마어마한 제품명을 만들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바우하우스가 바우하우스가 된 이유’는 바우하우스의 정신을 그대로 살려내 결혼이라는 이벤트에 접목시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바실리 칸딘스키의 추상화에서 단순함을 느낀 디자이너의 영감처럼, 결혼이라는 이벤트 역시 서로 다른 성질의 두 사람이 결합되는 형태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서로 다름이 만나 하나가 되어가는 여정은 실로 경이롭기까지 하죠.
그 과정의 결과를 웨딩밴드에 녹여내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오르시아 청담 하우스에 방문해 웨딩밴드 바우하우스(Bauhaus)를 착용해 보시면 남다른 착용감을 경험해 보실 수 있습니다. 바우하우스를 제작하며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바로 이 착용감. 서로 다른 합금이 만나 이루는 조화로움의 끝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의 결혼을 축복하며 오르시아가 당신께 드리는 선물. 바우하우스의 알맞은 착용감처럼 당신의 결혼 생활도 알맞은 자리를 찾아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3.오르시아 X 바우하우스(Bauhaus)
오르시아 바우하우스는 정면에서 보이는 모습과 측면에서 관찰되는 모습에 차이가 있습니다. 정면에서 보면 단지 단순한 원의 형태. 원의 형태가 돋보이게 한 데에는 바실리 칸딘스키의 작품 circles in circle의 영향이 있습니다. 원이 주는 불명확함 속 심플함. 하지만 측면에서는 서로 다른 종류의 세가지 합금이 붙어있는 모습입니다.
에스키스 노트 안의 디자인을 제품화하며 고민이 많았습니다. 디자인이라고 하면, 왠지 많은 요소가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심플하면서도 디자인을 잘 살릴 수 있을까? 그리고 가장 걱정되었던 부분은 착용감. 하나의 판금으로 주조하거나 단조하는 경우에는 고민할 부분이 아니었을 제품.
사실 착용감은 반지 단면의 무게, 부피에 따라 많이 달라지기 때문에 착용감 좋은 반지의 탄생은 숙련된 기술을 요하는 작업입니다. 특히, 오르시아 청담 하우스내에 자리잡은 공방안에서 수작업을 통해 만들어지기에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기도 하죠. 하지만 오르시아는 많은 고민끝에 오르시아만의 기술력과 장인 정신으로 뛰어난 착용감을 선보이는 제품을 만들어 내게 되었습니다.
심플하지만 디테일함을 놓치지 않는 디자인이 가미된 웨딩밴드 바우하우스(Bauhaus).
4. 바우하우스와 바실리 칸딘스키 이야기
바우하우스는 1919년 독일의 바이마르에 설립된 조형 예술학교입니다. 건축가 발터 그로우피스에 의해 설립된 바우하우스. 처음엔 공예 장인(마이스터)을 육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된 학교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바우하우스는 현대 디자인을 완성한 장소로 불리울 만큼 모더니즘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발터 그로우피스는 당시 모더니즘을 신봉하던 진보 예술가들을 교수로 대거 초빙합니다. 음악가, 조각가, 그리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파울 클레 그리고 바실리 칸딘스키. 칸딘스키가 처음부터 기하학적인 요소를 가미한 추상작품 활동을 한 건 아닙니다. 칸딘스키 역시 그림은 소묘로서 그 형태를 그대로 나타내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거꾸로 뒤집힌 그림 한 점을 본 것을 계기로 추상 작업에 몰입하게 됩니다. 바우하우스가 선 중심의 디자인에 중점을 두게 된 건 사실상 칸딘스키의 영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칸딘스키는 설립부터 폐교까지 바우하우스와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바우하우스의 태동은 당시 수공예를 벗어나 산업화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시대상 위에 공예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유레카! 생산하기 쉬우면서 아름다운 물건을 만들어야겠다! 그렇게 탄생한, 기능을 강조하면서 장식이 없는 기하학적 형태의 제품들. 이를 통해 ‘디자인’이 주목을 받게 되고 공예가와 산업이 결합해 디자이너라는 새로운 직업을 탄생시키게 된답니다.
사실, 바우하우스가 활동하던 당시 독일은 나치당이 자국내에서 영역을 넓혀 가던 시대. 나치당 설립 초기만 해도 바우하우스는 나치당이 주관하는 일을 도맡아하며 공존합니다. 하지만 바우하우스의 마지막 교장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나치와의 타협은 불가하다 선언합니다. 그 후 나치당으로부터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아쉽게도 바우하우스는 10년 남짓한 역사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10년 남짓한 짧은 역사지만 지금까지도 바우하우스가 추구했던 바는 많은 가구, 오브제 등의 디자인에 아직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5.웨딩밴드 ‘바우하우스(Bauhaus)’ 자세히 보기
point 1. 별다른 기교 없이 심플하고 간결한 밴드를 기술적으로 결합한 디자인으로, 세개의 다른 합금을 하나의 밴드로 결합해 제작
point 2. 조립식 반지의 복잡한 구조를 드러내지 않고 각 부분을 결합시켜 기술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심미적인 아름다움을 위해 간결한 곡선으로 반지의 실루엣을 표현
point 3. 칸딘스키의 그림 “circles in a circle” 을 시작으로 전개된 디자인으로 원의 형태를 중첩시키면서 발생하는 선과 면의 형태를 밴드로 표현